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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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는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다.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시작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수학했으며,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를 역임했다.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등과 협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커티스 음악원과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야샤 하이페츠와 함께 '백만 달러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연주 활동을 펼쳤으며,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는 또한 작곡가이자 체스 애호가였으며, 197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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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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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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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그리고리 파블로비치 퍄티고르스키 |
직업 | 첼리스트 |
국적 | 미국 |
배우자 | 자클린 드 로트실드(1937년 결혼) |
자녀 | 2명 (요람 피아티고르스키 포함) |
친척 | 대니얼 B. 드라크먼(사위) |
출생일 | 1903년 4월 17일 |
출생지 | 에카테리노슬라프, 러시아 제국(현재의 드니프로) |
사망일 | 1976년 8월 6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활동 기간 | 알 수 없음 |
알려진 이유 | 알 수 없음 |
주요 작품 | 알 수 없음 |
2. 생애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예카테리노슬라프(현재의 드니프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고, 첼로 소리를 듣고 첼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7세에 진짜 첼로를 받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장학금을 받아 입학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 사중주단에서 연주했고, 15세에 볼쇼이 극장 수석 첼리스트가 되었다.
소련 당국이 유학을 허가하지 않자, 첼로를 들고 폴란드로 탈출을 시도했다. 국경선에서 경비대에 총격을 받았지만 첼로와 함께 살아남았다. 18세에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한 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주선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로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미국을 처음 방문하여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1937년 자클린 드 로스차일드와 결혼했고, 194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커티스 음악원 첼로과 주임 교수를 지냈고, 탱글우드 음악 센터, 보스턴 대학교,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야샤 하이페츠, 윌리엄 프림로즈와 실내악을 녹음했다. 애장 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2. 1. 초기 생애 (러시아 시절)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는 1903년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재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다. 7세 때 오케스트라 콘서트에서 첼로를 처음 접하고 첼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1]모스크바 음악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알프레트 폰 글렌, 아나톨리 브란두코프 등에게 첼로를 배웠다.[1]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지역 카페, 극장 등에서 연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1]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 사중주단에서 활동했다.[1] 15세에는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임명되었다.[1]
2. 2. 유럽 활동과 망명
소련 당국, 특히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피아티고르스키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예술가 그룹과 함께 가축 열차를 타고 첼로와 함께 폴란드로 밀입국했다.[1] 그 여성 중 한 명은 덩치가 큰 소프라노였는데, 국경 수비대가 그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하자 피아티고르스키와 그의 첼로를 붙잡았다.[1] 첼로는 온전하게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것이 유일한 희생자였다.[1]18세가 된 피아티고르스키는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 후고 베커와 율리우스 클렝겔에게 잠시 사사받았고, 음식비를 벌기 위해 러시아 카페에서 트리오로 연주했다.[1] 카페 손님 중에는 에마누엘 포이어만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있었다.[1] 푸르트벵글러는 피아티고르스키의 연주를 듣고 그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고용했다.[1]
2. 3. 미국 정착과 활동
1929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빌렘 멩겔베르크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미국에 처음 방문했다.[1] 1937년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클린 드 로스차일드와 결혼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39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1] 194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1]1941년부터 1949년까지 커티스 음악원 첼로과 학과장을 역임했고, 탱글우드 음악 센터와 보스턴 대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1] 1949년 건강상의 이유로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하여 남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1] 1974년 USC는 그를 기리기 위해 '피아티고르스키 첼로 학과'를 설립했다.[1]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야샤 하이페츠, 윌리엄 프림로즈와 함께 실내악 그룹으로 활동했으며, RCA 빅터를 통해 음반을 녹음하여 "백만 달러 트리오"라고 불리기도 했다.
1976년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여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묘지에 안장되었다.[1]
2. 4. 가족
1937년 1월, 피아티고르스키는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에두아르 알퐁스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의 딸인 자클린 드 로스차일드(1911년 - 2012년)와 결혼했다.[1] 그해 가을 프랑스에서 첫 아이 젭프타를 얻었다.[1] 나치의 제2차 세계 대전 점령 이후, 1939년 9월 5일 가족은 르아브르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 엘리자베스타운에 정착했다.[1] 1940년에는 아들 조람이 태어났다.[1] 피아티고르스키는 젭프타에게서 세 명의 손자(조나단, 에반, 에릭)를, 조람에게서 두 명의 손자(아우란, 안톤)를 두었다.[1]3. 연주 활동 및 평가
1929년, 피아티고르스키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빌렘 멩겔베르크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1]
1941년부터 1949년까지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 첼로과의 학과장이었으며, 탱글우드와 보스턴 대학교에서도 가르쳤다.[1] 1949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사망할 때까지 이 대학과 관계를 유지했다.[1]
그는 매우 극적인 연주자였으며, 그의 연주 목표는 최대한의 표현을 전달하는 것이었다.[5] 그는 당대의 위대한 작곡가들과 광범위한 개인적, 직업적 교류를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진정성을 전달할 수 있었다.[5]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첼로 협주곡[5]), 파울 힌데미트 (첼로 협주곡), 마리오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 (첼로 협주곡[6]), 윌리엄 월턴 (첼로 협주곡), 버논 듀크 (첼로 협주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곡을 썼다.[5]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 리허설에서 피아티고르스키가 작곡가의 지휘 아래 연주했는데, D단조의 극적인 느린 변주가 끝난 후 슈트라우스는 "이제 내가 상상했던 돈 키호테를 들었다"고 말했다.[5]
피아티고르스키는 독특하고 빠르고 강렬한 비브라토가 특징이며, 모든 종류의 매우 어려운 활쓰기를 완벽하게 실행할 수 있었다.[5]
3. 1. '백만 달러 트리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피아노), 야샤 하이페츠(바이올린)와 함께 "백만 달러 트리오"라는 실내악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했다.[1] 이들은 RCA 빅터에서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1]3. 2. 실내악 활동
아르투르 루빈스타인(피아노), 윌리엄 프림로즈(비올라), 야샤 하이페츠(바이올린)와 함께 실내악 그룹에서 활동했던 피아티고르스키는, 일부에서 "백만 달러 트리오"라 불린 루빈스타인, 하이페츠와 함께 RCA 빅터를 위해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1]하이페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레너드 페나리오, 나탄 밀스타인과 사적으로 실내악을 연주했던 피아티고르스키는,[1] 1930년대에 호로비츠, 밀스타인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1]
3. 3. 독주 활동
1929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및 빌렘 멩겔베르크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1] 뛰어난 기교와 드라마틱한 표현력으로 독주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3. 4. 평가
이반 갈라미안은 피아티고르스키를 역대 최고의 현악 연주자 중 한 명으로 칭송했다.[5] 그의 연주는 웅장한 소리, 빠르고 강렬한 비브라토, 완벽한 활쓰기 기술이 특징이었다.[5]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첼로 협주곡[5]), 파울 힌데미트 (첼로 협주곡), 마리오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 (첼로 협주곡[6]), 윌리엄 월턴 (첼로 협주곡), 버논 듀크 (첼로 협주곡),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협주곡을 작곡했다.[5]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피아티고르스키의 돈 키호테 연주를 듣고 "이제 내가 상상했던 돈 키호테를 들었다"고 극찬했다.[5] 그는 자신의 드라마에 대한 열정을 위대한 러시아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의 독주회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한번은 젊은 피아티고르스키가 샬리아핀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노래를 충분히 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자, 샬리아핀은 "노래를 너무 많이 하고 말을 충분히 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고, 피아티고르스키는 샬리아핀의 노래에서 들었던 종류의 드라마와 표현을 자신의 예술적 표현에 통합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4. 작품
피아티고르스키는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1946년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된 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랄프 버코위츠가 관현악 편곡을 맡았으며, 이후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편곡도 이루어졌다.[7] 15개의 변주곡은 각각 카잘스, 힌데미트, 가르부소바, 모리니, 살몬드, 시게티, 메뉴인, 밀스타인, 크라이슬러, 자화상, 카사도, 엘만, 볼로니니, 하이페츠, 호로비츠 등 피아티고르스키의 음악 동료들을 나타낸다.[8]
5. 악기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 "바타"와 "보디오" 두 대를 소유했다. 1939년부터 1951년까지는 "잠자는 미녀"로 알려진 1739년산 도메니코 몬타냐나 첼로도 소유했다.
6. 기타
피아티고르스키는 체스 애호가였다. 그의 아내 재클린 피아티고르스키는 미국 여자 선수권 대회에 여러 번 출전하고 여자 체스 올림피아드에서 미국을 대표할 정도로 뛰어난 체스 선수였다.[9] 1963년, 피아티고르스키 부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국제 체스 토너먼트(피아티고르스키 컵)를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 대회는 파울 케레스와 티그란 페트로시안이 공동 우승했다.[9] 두 번째 피아티고르스키 컵은 1966년 산타 모니카에서 개최되었으며, 보리스 스파스키가 우승했다.[9]
참조
[1]
문서
cello.org biography
[2]
서적
My Many Years
https://archive.org/[...]
Knopf
[3]
서적
Piano ma non solo
Anagramme Ed.
[4]
서적
Biography of Vladimir Horowitz
Quill
[5]
간행물
Prokofiev: Cello Concerto in E minor, Op.58
https://web.archive.[...]
MusicaNova Orchestra of Scottsdale
2013-03-19
[6]
서적
Gregor Piatigorsky: The Life and Career of the Virtuoso Cellist
https://books.google[...]
McFarland & Co
2013-03-19
[7]
서적
A cellist's companion: a comprehensive catalogue of cello literature
Stichting The Cellist’s Companion
[8]
Liner notes
Wendy Warner Plays Popper and Piatigorsky
http://www.cedillere[...]
"[[Cedille Records]]"
[9]
뉴스
Milestone for a Benefactor of Historic Matches
https://www.nytimes.[...]
2011-11-19
[10]
문서
"[[ロシア語]]の場合の読みはグリゴリー・パヴロヴィチ・ピアティゴルスキ、[[ウクライナ語]]の場合の読みはフリホリー・ピャチホルシキー。"
[11]
문서
현악주자 > 첼로 > 피아티고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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